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소실된 경위 == 조선왕조실록은 선대 왕이 승하하고 후임 왕이 즉위하게 되면 실록청이라는 관청을 세워 선대 왕의 행적을 담은 기록인 사초를 모으고 편집하여 편찬하는데 최초의 편집을 초초, 두 번째 편집을 중초라 하여 초초, 중초를 거쳐 마지막 세 번째 편집인 정초 단계에 이르러서야 종이의 재활용을 위해 모든 사초를 물에 씻어 지우는 세초과정을 거치고 사고에 진열된다. 문종실록 11권은 이 총 세 번의 편집과정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되었다. === 치명적인 실수 === {{인용문|예문관 대교 권태일(權泰一)이 서계하기를, "신이 묘향산(妙香山)의 《실록(實錄)》을 상고하는 일로 명을 받고 내려가서 이달 16일에 기사관(記事官) 홍익준(洪翼俊)과 함께 의논하여 사고(史庫)를 열고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휘호와 시호를 올린 것과 시호를 더 올린 곡절에 대해서는 이미 고찰하여 치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열람하던 중에 마침 문종 대왕(文宗大王) 시대의 《실록》 한 편을 보니, 그 표지에 ‘제 11권’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그 내용은 제 9권의 내용으로서 9권은 거듭 있었으나 11권은 아예 없었습니다. 이는 필시 처음에 인쇄하여 나누어 저장할 때 권질이 잘못되어 서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 편 안에 기재된 1∼2월 사적은 앞으로 고증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전대의 역사에 빠진 일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선조실록 128권, 선조 33년 8월 29일 기해 4번째기사 예문관 대교 권태일이 시호와 실록 낙질에 대한 서계하다}} 이 치명적인 실수라 함은 다름아닌 문종실록 11권은 11권의 표지를 덮고있지만 내용은 9권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치명적인 실수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문종실록의 편찬으로부터 약 150여년 뒤인 1600년의 일로 임진왜란이 종식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는데 예문관 대교 권태일은 소실된 실록의 복원을 위해 전주사고에 들렀다가 이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발생된 11권의 누락을 발견하고 보고하게 된것이다. 다시 말해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다른 사고 어딘가에는 권11이 2권 있었을 것이지만 앞서서 말한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사본들이 홀라당 타버렸기 때문에 복원을 하지못해 11권만은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요약: 로미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로미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