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한국 로스트 미디어 빙산}} ----- {{로스트 미디어 정보 | 테두리 색 = gray | 배경색 = gray | 글씨색 = white |로스트 미디어 이름 = 문종공순대왕실록 11권 | 로스트 미디어 이름2 = 文宗恭順大王實錄 十一卷 |사진 = 문종실록.jpg |이름 = 문종실록 11권 | 제작 시기 = 1454년 ~ 1455년 | 제작국 = {{국기나라|대한민국}} (당시 단종·세조 치세하 조선) | 현재 상태 = {{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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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공순대왕실록 11권 文宗恭順大王實錄 十一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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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문종실록 11권 |
제작 시기 | 1454년 ~ 1455년 |
제작국 | 대한민국 (당시 단종·세조 치세하 조선) |
현재 상태 | 소실됨 |
주제 | 인쇄 매체, 고문헌 |
개요[편집]
문종실록은 조선 제5대 국왕인 문종 이향(李珦) 재위(1450~1452) 2년 3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본래 13권 6책이 존재해야하나 현재 남아있는 분량은 12권으로 유일하게 결본이 존재하는 조선왕조실록이다. 본문의 사진은 문종실록 1권 2책의 표지이다.
소실된 경위[편집]
조선왕조실록은 선대 왕이 승하하고 후임 왕이 즉위하게 되면 실록청이라는 관청을 세워 선대 왕의 행적을 담은 기록인 사초를 모으고 편집하여 편찬하는데 최초의 편집을 초초, 두 번째 편집을 중초라 하여 초초, 중초를 거쳐 마지막 세 번째 편집인 정초 단계에 이르러서야 종이의 재활용을 위해 모든 사초를 물에 씻어 지우는 세초과정을 거치고 사고에 진열된다. 문종실록 11권은 이 총 세 번의 편집과정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되었다.
치명적인 실수[편집]
예문관 대교 권태일(權泰一)이 서계하기를,
"신이 묘향산(妙香山)의 《실록(實錄)》을 상고하는 일로 명을 받고 내려가서 이달 16일에 기사관(記事官) 홍익준(洪翼俊)과 함께 의논하여 사고(史庫)를 열고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휘호와 시호를 올린 것과 시호를 더 올린 곡절에 대해서는 이미 고찰하여 치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열람하던 중에 마침 문종 대왕(文宗大王) 시대의 《실록》 한 편을 보니, 그 표지에 ‘제 11권’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그 내용은 제 9권의 내용으로서 9권은 거듭 있었으나 11권은 아예 없었습니다. 이는 필시 처음에 인쇄하여 나누어 저장할 때 권질이 잘못되어 서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 편 안에 기재된 1∼2월 사적은 앞으로 고증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전대의 역사에 빠진 일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선조실록 128권, 선조 33년 8월 29일 기해 4번째기사 예문관 대교 권태일이 시호와 실록 낙질에 대한 서계하다 |
이 치명적인 실수라 함은 다름아닌 문종실록 11권은 11권의 표지를 덮고있지만 내용은 9권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치명적인 실수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문종실록의 편찬으로부터 약 150여년 뒤인 1600년의 일로 임진왜란이 종식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는데 예문관 대교 권태일은 소실된 실록의 복원을 위해 전주사고에 들렀다가 이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발생된 11권의 누락을 발견하고 보고하게 된것이다. 다시 말해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다른 사고 어딘가에는 권11이 2권 있었을 것이지만 앞서서 말한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사본들이 홀라당 타버렸기 때문에 복원을 하지못해 11권만은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11권 누락에 대한 다른 기록[편집]
동지 춘추(同知春秋) 이상진(李尙眞) 등이 등서(謄書)한 실록(實錄)을 강도(江都)의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했는데, 실록의 낙권(落卷)과 낙장(落張)의 숫자가 도합 3백여 권(卷)이었다. 강도의 실록이 비로소 약간이나마 갖춰지게 되었는데 문종조(文宗朝)의 실록 1권은 여러 곳의 사고에 모두 결본(缺本)된 까닭에 등서하여 보결(補缺)하지 못하였고, 기타 낙자(落字)와 오자(誤字)가 매우 많아 바로잡긴 했으나 그래도 미진하니, 아쉬운 일이다. |
현종실록 11권, 현종 7년 1월 9일 경인 2번째기사 동지 춘추 이상진 등이 등서한 실록을 강도의 사고에 봉안하다 |
기사관(記事官)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신이 오대산(五臺山)의 포쇄(曝曬) 때에 보니 《문종실록(文宗實錄)》의 신미년 10월 이후 임신년 2월 이전이 빠져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마는, 인쇄한 종이가 얇고 나쁘며 또 주필(朱筆)한 흔적이 있었으니, 찬수(纂修)할 때의 중초(中草)일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곳의 포쇄 때에 상고하여 여쭈도록 하라." 하였다. |
영조실록 19권, 영조 4년 10월 29일 병오 1번째기사 기사관 이종백이 오대산의 포쇄에 대해 아뢰다 |
한림(翰林)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문종실록(文宗實錄)》 제11편이 본관(本館)과 적상산(赤裳山)·태백산(太白山)의 여러 사고(史庫)에 누락되었으니, 청컨대, 오대산(五臺山) 사고의 포쇄(曝曬) 행차 때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본관에 도착한 뒤 각본(各本)을 전서(傳書)하여 여러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합당하게 여겼다. |
영조실록 36권, 영조 9년 11월 4일 신사 2번째기사 《문종실록》 11편이 사고에 누락되어 있는 문제를 논의하다 |